그림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내가 마주보고 있고,
당신이 돌아서는 순간

 글:박세미


그림 시
시 그림

“유학 시절이었어요. 어떤 무력감에 사로잡혀 누워있었죠. 그리곤 눈을 감고 상상했어요. 욕조 안에 레몬을 가득 담고 손으로 물을 휘휘 저으며 그것들을 씻는 상상을요. 그 장면으로부터 나온 그림이 ‘Fruit Bath’예요.” 
당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저는 어떤 감각적 황홀감에 빠져들었습니다. 청량하고 환한 노랑의 둥근 것들이 휘도는 시각적 향연, 물을 저을 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과 부딪히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촉각적 저항, 콧속으로 훅 들이닥쳤다가도 금세 잔잔해지는 상큼한 후각적 리듬, 그리고 둔탁하게 일렁이는 청각적 배경. 그러한 감각들의 총합과 연쇄가 순식간에 저를 사로잡았지요. 당신의 그림 앞에 서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비슷한 감각을 경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욕조 안에 레몬을 쏟아붓는 상상의 이미지 외에도 달리는 기차의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고드름이 녹아 내리는 장면()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그렇게 무심코 흘러가는 일상에서 새로운 지각을 통해 낚아채는 어떤 순간이 ‘시적인 순간’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많은 작업들은 시적인 순간을 껴안고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적인 것 그 자체가 시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즉 시적인 어떤 것이 변형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처음의 의도를 배반하기도 하면서 고유한 인식과 언어로 전환될 때야 비로소 시가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당신의 붓은 ‘시적인 물’에 처음 적셔지지만, 색을 만들고 물감을 바르고 펴내고 긁어내고 다시 덧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인식과 감각의 총체로서의 그림으로 이행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작(詩作)의 메커니즘을 내장하고 있는 회화라고 해야 할까요?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혹은 결과물이 발생시키는 감상으로서의 ‘시적인 그림’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의 작업에 ‘시 그림’ 혹은 ‘그림 시’라고 조심스럽게 이름 붙여보고 싶습니다. 또한 주제나 의미의 전달을 추구하는 산문에 비해 시가 언어적 뉘앙스와 미학을 탐구하는 언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마띠에르의 꿈
고백하자면, 저는 당신의 그림 앞에서 처음 섰을 때, 강력한 충동을 가까스로 제어했습니다.
마치 빵에 듬뿍 떠 바른 버터처럼 캔버스 위에 발라진 물감이라는 질료 때문이었지요. 그것은 만지고 싶고, 맡고 싶고, 핥고 싶을 만큼 맛있게 생긴 입체였습니다. 평면 위에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덩어리들 앞에서 두 손을 겨우 맞잡고 있다가 급기야 캔버스 테두리 바깥으로 주물처럼 삐죽 튀어나온 것을 발견하고 한 손을 갖다 댈 뻔 했습니다.(사실 살짝 만져 본 것도 같습니다.)
당신이 평면에 쌓아올린 마티에르를 보면서 저는 제가 좋아하는 박상순 시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네가 떠날 때
바다는 그가 품었던 모든 물고기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
-「피날레 Finale」 중에서 (『Love Adagio』, 민음사, 2004)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른 물고기 떼의 몸부림처럼, 캔버스에서 탈주하려하지만 여전히 캔버스에 붙들려 있는 물감의 비늘들, 물감의 지느러미들, 물감의 뻐끔거림들….
그리고 다시, 캔버스의 네모난 테두리 바깥으로 튀어나온 마티에르를 바라보는데, 캔버스 안에 구속된 마티에르의 꿈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모두가 그것을 향해가고 있다고. 공중에서 살아있을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의 스스로의 힘을 가지는 것. 마침내 캔버스를 꼬리에 매달고 날아오르는 마티에르의 꿈.   
그리고 이어서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거세게 항변하고, 선언하고, 어지럽히고, 난해하게 하는 것만이 전위가 아니라는 생각. 성실한 손이 형성한 고요한 끓어오름 역시 전위의 일종이라는 생각.   


완성으로부터 돌아서는 순간
그러나 ‘Momentum’, ‘Track’과 같은 당신의 최근작들은 앞선 마티에르의 꿈을 무심히 묵살하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 같습니다. 아니죠. 물리적인 탈주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캔버스와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차렸다고 해야 할까요?
롤러코스터나 낙엽의 소용돌이, 스노우볼에서 감지되는 속도와 운동성을 캔버스 위로 옮겨와 극대화시키는 작업, 그 속에서 당신의 손은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 사이를 오가는 것 같습니다.
이는 당신이 “나는 고정된 아이디어를 작업을 시작하기보다 매우 느슨한 생각으로 출발한다. 결정적으로 물감을 먹은 붓을 캔버스 표면에 대는 순간 매우 빠르고 직관으로 화면을 채워나간다”(2016년 6월 작가노트 중)고 말한 것과 같이 여전히 예측 불가능성에 손을 맡기면서도, 그림 위에 그림을, 그 위에 또 그림을 입히고 입혀 오직 하나가 되는 질서를 향해 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고도의 감각을 재차 쌓아올리다 보면, 마주하는 완성. 그 완성 뒤에 당신이 서 있고, 그 완성 앞에 제가, 그리고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다가, 잠시 통했다가, 이윽고 돌아섭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이 말을 하려고 글을 썼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등지고 돌아서서 새 캔버스 앞으로 가는 모든 순간이 당신의 모멘텀이라고요.